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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로마서 9장 강해, 구원의 확신과 바울의 눈물

붙잡혀 돌아온 장발장에게 주교는 은촛대 두 개까지 건넨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속 그 장면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끝내 버리지 않는 자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로마서 9장 1–5절 강해를 읽으면, 구원의 확신 뒤에 이어지는 바울의 눈물이 새롭게 다가온다. 은혜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안도에 머물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깊어진다.

구원의 확신 곁에, 형제를 위한 눈물이 고인다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바울은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죄책과 두려움에 흔들리던 사람에게 이보다 깊은 위로는 드물다. 그런데 그 선언에 이어지는 9장의 첫머리에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놓여 있다. 구원의 기쁨이 가장 높이 울리는 자리에서, 바울은 형제의 구원을 생각하며 운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로마서 9장 3절의 이 고백은 앞선 확신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절절해진다. 아무것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동족을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좋겠다는 심정을 드러낸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양심이 증언한다고 밝히며, 이것이 가볍게 꾸민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고백을 모순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더욱 깊어진 사랑으로 읽는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동족의 불신앙에 무관심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랑을 알기에, 형제들이 복음 밖에 남아 있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잊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힘이다.

은혜로 들어선 문에는, 자랑할 공로가 없다

이 눈물의 의미를 알려면 바울이 지나온 은혜의 길을 함께 보아야 한다. 설교가 로마서 9–11장의 선택과 유기를 다루기 전에 1–8장의 구원 교리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잊으면, 택함받았다는 고백은 쉽게 자신을 높이는 말로 바뀐다. 그러나 은혜의 출발점에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내가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내가 서 있다.

로마서 1–4장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은 모두 죄의 현실 앞에 선다.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공로로는 누구도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도, 구원의 문이 자격을 증명한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믿음은 자신의 성취를 내세우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지하는 일이다.

로마서 5장 8절은 그 사랑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어졌다고 밝힌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된 뒤에야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싸우고 순종하며,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성화의 길을 걷는다. 칭의와 성화, 영화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은혜는 처음 들어서는 문이자 오늘의 삶을 움직이는 힘이다.

바울 자신도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동족에게서 겪은 핍박과 살해 위협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지우지 못했다. 원수였던 자신에게까지 이른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거절하는 형제는 함부로 단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전도는 우월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 형제를 향해 다시 걸어가는 일이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부르심은 동족을 잊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바울에게 새로운 사명의 길과 오래된 형제를 향한 마음은 서로를 지우지 않았다. 복음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고 해서 가까운 사람의 구원이 사소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물은 선교의 넓이와 사랑의 깊이가 함께 자라야 함을 보여준다.

선택의 은혜는, 형제 앞에서 몸을 낮춘다

로마서 9장 4–5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양자 됨과 영광, 언약과 율법, 예배와 약속을 헤아린다. 육신으로는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다. 이 목록은 동족을 비난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알기에 더욱 깊어지는 슬픔의 언어다. 약속을 간직한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정작 그 성취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 익숙한 예배와 오랜 신앙의 이력 또한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약속을 안다는 사실과 그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자랑하며 오늘의 순종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바울의 슬픔은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춘다. 다른 이의 완고함을 말하기에 앞서, 은혜를 가까이 두고도 마음은 멀어질 수 있는 자신을 살피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불신앙은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까. 이 설교는 선택과 유기를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책임, 믿음의 응답을 함께 살피며 읽는다.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버리신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 논의를 바울의 애통함에서 떼어놓으면, 살아 있는 사람의 구원이 차가운 분류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

로마서 10장 9–10절이 가리키는 길은 자기 의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이다. 불신앙의 책임을 흐려서는 안 되지만, 그 책임을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은혜를 잊어서도 안 된다.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판단이 기도보다 앞서고 있다면, 선택의 진리를 아는 지식보다 그 지식을 품고 있는 마음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리를 설명하는 입술과 형제를 바라보는 눈빛은 서로 다른 신앙을 말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창세기 33장에서 에서를 만나러 가는 야곱의 모습으로 이 책임을 비춘다. 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에게 예물을 보내고 일곱 번 몸을 굽히며 화해를 청한다. 형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고백하는 자리에는, 축복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끝나지 않는 신앙의 길이 있다. 택함받은 기쁨이 형제 앞에서 몸을 낮출 필요까지 없애주지는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책임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빚’으로 풀어낸다. 은혜로 얻은 구원이 자신만의 특권으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갈등 속에 남겨둔 형제를 돌아보는 마음과 이어져야 한다. 신학적 통찰의 깊이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분하는지보다, 받은 사랑을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회개의 길목에서, 소망은 돌아올 자리를 남긴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물음에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자신도 은혜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남은 자들을 두셨다. 많은 이가 넘어졌다는 현실이 회복을 향한 기대까지 닫아버릴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불신앙을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향한 소망을 놓지 않는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비유는 이방인 신자의 교만을 멈추게 한다. 자기 힘으로 얻지 않은 자리에 서서 원래의 가지들을 향해 자랑할 수는 없다. 로마서 11장 22절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죄와 불신앙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이들을 향한 기대 또한 거두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설교가 강조하는 것은 떠난 사람의 운명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를 위한 기도를 계속하는 태도다. 지금 복음을 거절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돌아올 자리까지 마음에서 지우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완악함을 보면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닫지 않는 일은, 받은 구원을 자랑하는 것보다 때로 더 어려운 순종이다. 그러나 바울의 눈물이 가르치는 사랑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인내한다.

말씀의 흐름은 마침내 로마서 12장의 삶을 드리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은 지체를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며,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성경 묵상은 선택과 유기를 이해했다는 만족에서 끝날 수 없다. 이해한 은혜가 누구를 위한 기도가 되고, 누구에게 다가가는 섬김이 되는지가 남는다.

갈등 속에서 멀어진 가족, 마음으로 포기한 형제, 복음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더는 기도하지 않게 된 사람이 떠오를 수 있다. 바울의 고백은 그들의 이름을 정죄의 목록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옮겨놓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음을 기뻐하는 오늘, 나는 누구를 내 사랑에서 너무 쉽게 끊어내고 있는가.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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