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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설교로 읽는 성령의 열매와 복음의 은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속 두 손끝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인간의 갈망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따라 흐르는 장재형 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 설교의 시선은 사람이 하늘을 붙잡는 장면보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으로 붙드신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스스로 빚어 낸 도덕의 장식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가 마음과 관계 속에서 자라난 흔적이다. 사랑에서 시작해 희락과 화평으로 번지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절제에 이르는 길은 결국 성령 안에서 새로워지는 삶의 길이다.

사랑이 복음의 첫 숨이 될 때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 그 가운데 사랑이 먼저 놓인 것은 단순한 순서가 아니다. 설교는 이 사랑을 나머지 모든 열매를 품고 움직이게 하는 중심으로 바라본다. 사랑이 없으면 기쁨은 쉽게 감정의 물결이 되고, 화평은 잠시의 안정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의 감정적 호감과 다르다. 로마서 5장이 전하듯,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고백 안에서 사랑의 깊이가 드러난다. 이 사랑은 인간이 먼저 증명한 자격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은혜의 사건이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을 높이는 언어가 아니라, 먼저 사랑받았음을 아는 겸손한 응답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성령의 열매를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 안에서 구체화되는 방식으로 읽는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울림처럼 사랑이 없으면 지식도 은사도 공허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받고, 그 사랑 안에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으로 빚어지는 일이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면서, 모든 열매가 자라는 토양이다.

이 사랑은 신앙의 감정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십자가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고, 그 부름 앞에서 사람은 자기 의를 내려놓는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다는 고백이 깊어질수록, 타인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복음은 사랑받은 사람이 다시 사랑하는 존재로 변하는 은혜의 질서다.

은혜가 빚어내는 기쁨과 화평

이때 중요한 것은 열매가 서로를 밀어낸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를 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화평을 넓히며, 화평은 오래 참을 힘을 준다. 성령의 일하심은 그렇게 한 사람의 내면을 넘어 공동체의 공기까지 바꾸어 간다.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생기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흐른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이 말하는 충만한 기쁨은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솟아나는 영적 생동감이다. 이 기쁨은 혼자만의 감정으로 갇히지 않고 공동체 안으로 번져 간다.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말보다 먼저 그 안에 흐르는 생명의 밝음을 느낀다.

화평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정과 같지 않다. 바울의 인사 속에서 은혜가 먼저 오고 평강이 뒤따르듯, 마음의 참된 쉼은 내가 이룬 조건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이 이루신 구원에서 흘러나온다. 죄책과 정죄감에 묶였던 사람이 은혜 안에서 자유를 얻을 때, 마음은 좁아지지 않고 넓어진다.

갈라디아 교회가 흔들린 이유는 바로 이 은혜의 질서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율법을 더해야 의롭게 된다는 압박은 사람을 더 거룩하게 하기보다 비교와 판단으로 몰아갔다. 복음이 희미해지면 사랑의 기쁨보다 긴장이 커지고, 은혜의 화평보다 분열이 앞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운 미덕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를 다시 복음의 자리로 부르는 신학적 통찰이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말하는 흐름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해석하는 중요한 문이 된다. 은혜를 잃으면 사람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고, 다른 사람도 같은 잣대로 재기 시작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마음에는 이상한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가 화평이고, 그 화평이 공동체를 숨 쉬게 한다.

믿음은 오래 참고 짐을 함께 진다

사랑은 말의 온도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태도로 드러난다. 오래 참음은 단지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다. 자비는 받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마음이며, 양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실제 자리에서 행하는 순종이다.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는 신실함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책임 있는 헌신으로 나타난다.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성숙의 표지다.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이듯, 성령 안에서 자란 사람은 남을 정죄하기보다 품고 바로 세우려 한다. 절제는 방종을 자유로 오해하지 않는 마음의 질서다.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 흐름 속에서, 절제는 성령 안에서 기쁘게 자신을 다스리는 자발적 순종으로 이해된다.

이 열매들은 모두 관계 안에서 시험받는다. 평온한 순간의 온유보다 누군가의 허물을 보았을 때의 온유가 어렵고, 말로 고백하는 사랑보다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머무는 사랑이 깊다. 장재형 목사 설교가 비추는 복음의 삶은 그래서 개인의 내면 수양에 갇히지 않는다. 사랑은 결국 누군가의 짐 앞에서 내 자리를 선택하는 일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 양선과 충성은 서로 따로 떨어진 덕목이 아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오래 바라보는 인내가 있을 때 자비가 가능하고, 자비가 마음에 머물 때 선한 행동은 억지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열매가 된다. 충성은 그 열매가 시간이 지나도 시들지 않게 하는 신실함이며, 온유와 절제는 그 신실함이 교만으로 변질되지 않게 지켜 주는 울타리다.

그렇기에 성령의 열매는 한순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열매는 시간이 지나며 드러나고, 관계의 무게 속에서 익어 간다. 오늘의 작은 말과 선택, 용서와 기다림이 쌓일 때 복음은 추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삶의 형태가 된다.

회개와 소망이 머무는 공동체

갈라디아서 6장에 이르면 성령의 열매는 공동체의 윤리로 더 깊어진다. 누군가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바울은 신령한 사람들이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잡고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한다. 여기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끝내 버리지 않는 복음의 균형이 담겨 있다. 회개는 정죄의 벼랑으로 밀려나는 일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율법주의는 허물을 발견하면 돌을 들지만, 십자가의 정신은 그 짐을 함께 지며 회복을 구한다. 요한복음 8장의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처럼, 복음은 죄를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정죄의 자리로만 밀어 넣지 않는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도 회복의 언어를 배운다.

동시에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체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말은 책임을 없애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피도록 돕는다. 서로의 짐을 지는 사랑과 자기 짐을 지는 책임이 함께 있을 때, 교회는 감상적인 위로를 넘어 건강한 소망의 공동체가 된다.

바울이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도 이 흐름 속에서 읽힌다. 남의 허물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을 의로운 자리에 세우기 쉽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자기 일을 살피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짐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 겸손이 있을 때에만 서로의 짐을 지는 사랑도 왜곡되지 않는다.

아담의 교만과 가인의 시기 질투를 떠올리게 하는 설교의 흐름은 오늘의 마음에도 낯설지 않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잊게 만들고, 비교하는 마음은 형제를 동행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게 한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이 경고하듯 헛된 영광을 구하면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낮아지고, 다시 사랑하고, 다시 함께 걷는 길을 연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성령의 열매와 그리스도의 법은 오늘의 신앙에도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자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것인가. 복음은 완벽한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들이 다시 사랑을 배우는 길이다. 오늘 우리 곁에 놓인 짐 하나를 함께 들어 올릴 때, 성령의 열매는 비로소 말씀이 아니라 삶의 향기로 남는다.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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