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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 구원의 소망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가 로마서 8장 18절부터 27절까지를 해설하며 반복해서 세우는 중심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금-여기'의 감정과 사정에 가두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치는 거대한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바울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선언할 때, 그는 고난을 미화하지도, 고통을 억지로 지워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상실과 압박, 관계의 균열과 몸의 약함, 신앙을 지키는 대가로 감수하는 손해와 외로움이 얼마나 무게 있는지 정직하게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무게가 최종의 무게는 아니라는 것, 지금의 고난이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비교"라는 단어로 정면 돌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교가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신학적 전환이라고 말한다. 고난의 실재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실재를 확대함으로써 고난을 다른 빛 아래 두는 전환이다.

이 전환의 핵심에는 시간에 대한 성경적 감각이 놓여 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라는 말은 언뜻 문법적으로도 낯설다. 이미 얻었다는 과거의 확정과, 소망이라는 미래의 지향이 한 문장 안에서 동시에 호흡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 속에서 신자가 서 있는 자리를 '이미와 아직'의 긴장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지만,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미래에 남아 있다. 그래서 신앙은 끝난 사건의 여운이 아니라, 보증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현재형의 여정이 된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는 바울의 역설(롬 8:24)은, 신자가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절망의 언어를 배우지만, 보이지 않는 약속이 더 깊은 실재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인내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장재형목사가 "앞면이 영광이라면 뒷면은 고난인 동전의 양면 같다"고 말할 때, 그는 고난을 영광의 '조건'으로 거래하듯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길이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향했던 예수의 궤적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고난 자체가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깊어지고 신앙의 시선이 정련된다는 뜻에 가깝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하신 말씀도, 고난이 영원한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더 큰 실재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보상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그는 값싼 번영의 공식을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가 실제이기에 오늘의 희생과 인내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즉 보상은 인간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제시하는 흥정의 카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으로 보증하신 신실함의 다른 이름이다.

바울의 "비교할 수 없다"는 선포는 실제적인 삶의 자세를 바꾼다. 세상은 고난을 실패의 징표로만 읽으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바울을 따라 고난을 "해석의 자리"로 초대한다. 고난이 오면 우리는 즉각 원인을 찾아 자책하거나 타인을 비난하고, 혹은 무의미의 늪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고난의 원인을 단순화하기보다, 고난을 품은 채로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의 훈련"을 가르친다. 이 전망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성령은 장차 완성될 영광의 예고편이자 첫 열매이며, 그래서 신자는 지금의 눈물 속에서도 영광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으로 부름받는다.

그런데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8장을 특별히 '우주적 구원의 소망'으로 읽는 이유는, 바울의 시야가 개인의 마음을 넘어 피조세계 전체로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는 구절에서 바울은 놀랍게도 '피조물'에게 기다림의 주체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고대'로 번역된 헬라어 ἀποκαραδοκία는 목을 길게 빼고 끝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형상을 담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단어가 보여 주는 긴장과 간절함을 통해, 창조 세계가 단지 인간의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 참여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인간만이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해 상처 입은 세계 전체가 해방을 갈망한다. 바울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고 말할 때, 그 탄식은 자연의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타락의 보편적 결과에 대한 증언이며, 동시에 회복의 임박함을 알리는 해산의 진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창세기의 타락 서사와 연결해 읽는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선언(창 3장)은 단지 농사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비틀렸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다스림'은 본래 억압이 아니라 돌봄과 경작, 책임과 섬김의 청지기직이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을 사랑과 자비의 주관자로 세우기보다, 탐욕과 폭력의 횡포자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롬 8:20)하게 된다. 허무란 목표를 잃은 삶, 방향이 꺾인 존재 상태다. 장재형목사는 이 허무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구조, 경제 시스템, 자연 생태의 파열로 확장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주적 구원은 개인의 죄책감만 다루는 협소한 처방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면적 회복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의 스케일이다.

이 관점은 오늘의 시대에도 날카롭게 적용된다. 기후 위기, 환경 파괴, 재난의 반복, 생명의 가치가 가볍게 취급되는 문화는, 로마서 8장이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을 현실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우주적 구원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전부 고칠 수 있다"는 낙관을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을 더 깊이 붙드는 신앙의 현실주의를 요청한다. 바로 그 때문에 교회는 방관자가 될 수 없다. 창조가 신음하는데, 구원받은 공동체가 무관심으로 침묵한다면, 소망은 추상적 구호로 전락한다. 장재형목사는 소망이 크기 때문에 실천이 작아도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절제, 한 공동체의 돌봄, 한 세대의 책임 있는 선택은 우주적 구원의 완성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회복에 동참하는 겸손한 순종이 된다. 환경을 돌보고 약자를 보호하며 불의를 줄이는 노력은 복음을 '사회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복음이 본래 지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현실 속에서 미리 맛보는 과정이다.

바울은 이어서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리라"(롬 8:21)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해방'이 단지 영적인 기분 전환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임을 강조한다. 썩어짐은 시간의 풍화만이 아니라, 죄가 만들어 낸 파괴의 구조와 소모의 습관을 가리킨다. 인간이 탐욕의 속도로 세계를 소비할 때, 자연은 물론 인간의 영혼과 관계도 함께 닳아간다. 그래서 영광의 자유는 방종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한 질서 안에서 제자리를 되찾는 자유다. 창조가 해방될 때 인간 역시 해방된다. 이 관점은 신자에게 생태적 책임을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삶의 결로 받아들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신음에도 예민해지게 만든다. 피조물의 탄식은 환경의 문제이면서, 억눌린 자들의 눈물과도 연결된 탄식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바라보는 회복은 단절이 아니라 갱신이다. 요한계시록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할 때(계 21장), 그것은 창조를 폐기하고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는 선언은, 하나님이 무너진 것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적극적 구원 행위를 가리킨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라는 표현도 같은 방향을 갖는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성경의 종말론이 파국의 비관이 아니라 회복의 희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신자는 종말을 두려움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종말을 기다리며 오늘을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미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현재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현재의 선택이 더 무거워진다. 우주적 구원은 현실 책임을 지우는 마취제가 아니라 현실 책임을 깨우는 종소리다.

장재형목사가 우주적 구원을 말할 때, 그는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를 더 무겁게 만든다. 왜냐하면 미래의 완성은 현재의 삶을 무의미하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예행연습의 자리'로 바꾸기 때문이다.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품을 아직 소유하지 못하지만, 그 세계의 문법을 미리 살아 보이는 공동체로 부름받는다. 예배는 단지 주일의 감정 충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우리 몸과 언어, 관계를 다시 배열하는 시간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의 소망이 예배와 윤리를 분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평일에는 창조를 경멸하고 이웃을 무시할 수 없다. 반대로 일상에서 작은 선을 실천하는 손길은 예배에서 고백한 소망이 거짓이 아님을 증언한다. 이렇게 교회는 미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곳'이면서 동시에 그 영광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곳'이 된다.

이 종말론적 전망을 시각적으로 붙잡게 하는 한 편의 명화를 떠올린다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제단화 '최후의 심판'이 좋은 비유가 된다. 그 거대한 장면은 단지 공포를 조장하는 도상으로만 읽히기 쉽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역사가 무작위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심판과 회복이라는 중심을 향해 수렴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늘과 땅, 영혼과 몸, 개인과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고 한 화면에 담긴 구도는,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우주적 구원의 통합성을 연상시킨다. 피조물의 탄식과 성도의 탄식은 따로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한 세계가 새롭게 되기까지 이어지는 합창이다. 장재형목사가 "탄식"을 설명할 때, 그는 패배의 한숨이 아니라 탄생을 앞둔 진통의 숨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진통은 고통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파괴가 아니라 생명이다.

그렇다면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라고 말하는 대목을 '인내의 신학'으로 읽는다. 이 인내는 소극적 체념이 아니다. 인내는 방향을 유지하는 능동성이고, 가치의 중심을 지키는 결단이며, 하나님 나라의 리듬으로 오늘을 배열하는 지혜다. 기다림에는 선택이 따라온다. 즉각적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정의의 편에 서겠다는 선택, 소비와 과시의 문화 속에서도 절제와 나눔을 선택하겠다는 결단, 약자의 목소리가 묻힐 때 함께 울어 주겠다는 결심,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자기 욕망을 내려놓겠다는 훈련이 기다림의 구체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보상신앙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때 왜곡을 피한다. 보상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확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미래의 확실성이다. 그래서 신자는 보상을 소유하려고 조급해지기보다,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8장을 통해 권면하는 기다림은 영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미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막연한 상상력이 아니라, 시선을 훈련하는 습관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고난을 해석하는 언어를 배우고, 감사와 탄식이 함께 있는 기도를 통해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누며 인내의 근육을 단련한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소망의 기억'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역사의 중심을 바꾸었는지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폭풍을 과장하지 않게 하는 방파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고난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기억이 살아 있으면 고난은 '과정'으로 재배치된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깊은 물결 위에 서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을 걷는 신자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수없이 깨닫는다. 마음이 지치고 생각이 흐려지며,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날이 온다. 바로 그때 로마서 8장 26-27절이 복음의 핵심처럼 다가온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기도의 비밀'이라 부르며, 기도가 우리의 능숙함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언어는 자주 자기중심적이고, 우리의 감정은 쉽게 과열되며, 우리의 통찰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성령은 그 부족함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족함을 재료로 삼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로 "번역"해 올리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롬 8:27)라는 문장은, 우리의 혼란이 하나님 앞에서 방치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성령의 탄식은 낙담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이며, 중보는 무력함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 응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중보가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다시 참여하도록 일으켜 세운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바울의 가르침은, 성령의 중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한다(히 7:25).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연결하여, 신자의 기도가 '홀로 하나님께 도달해야 하는 사다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 있는 길 위를 걷는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성자의 은혜로 담대히 나아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땅히 구할 것을 배우며, 아버지의 선하심 안에서 응답을 기다린다. 그래서 기도는 실패의 경험이 아니라, 은혜의 체험이 된다. 어떤 날은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기도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의 중보에 의탁하는 겸손을 배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기도의 자유는 바로 이 의탁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도를 보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가 이 대목을 강조할 때, 기도는 더 이상 '형식적 의무'나 '영적 성과의 지표'가 아니라 은혜의 관계로 회복된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시간이다. 때로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도, 침묵이 길어도, 울음만 남아도, 그 자리가 헛되지 않다. 성령이 그 자리에서 탄식하며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결과를 조급히 생산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법을 배운다. 그 순간 기도는 "나의 계획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정렬시키는 과정"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말하듯, 기도는 답을 만들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됨의 핵심은 교만의 해체와 겸손의 형성, 즉 하나님 중심으로의 재배치다.

성령의 중보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교회가 약해지는 이유는 종종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쟁과 비교의 언어가 공동체를 지배하면, 고난은 개인의 수치가 되고 탄식은 불평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탄식을 성령의 언어로 복원한다. 탄식은 정죄가 아니라 연대다. 한 지체가 무너질 때 다른 지체가 함께 울 수 있고, 한 사람이 길을 잃을 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교회의 한 몸 됨'은 감정적 친밀감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령이 한 사람을 위해 탄식하실 때, 그 탄식이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어 서로를 위한 중보로 이어지는 영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기도는 개인 경건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로 남는 방식, 곧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또한 '탄식'이라는 단어는 신자에게 슬픔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탄식을 신앙의 결핍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로 해석한다. 시편이 종종 하나님께 항변하고 눈물로 호소하듯,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매달리는 행위다. 교회가 탄식을 잃어버리면,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세상의 파열에 둔감해질 위험이 커진다. 반대로 교회가 탄식을 회복하면, 고난당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더 오래 듣고, 피조물의 신음을 더 섬세하게 감지하며, 즉각적 해결이 없어도 함께 기다리는 성숙을 배운다. 이렇게 탄식은 공동체를 냉소에서 구해 내고, 사랑을 더 실제적으로 만든다.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8장에서 길어 올리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가장 깊은 약속의 음색이다.

또한 로마서 8장 23절이 말하는 "우리 몸의 속량"은, 우주적 구원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다시 확인시킨다. 구원이 영혼만 구출하는 탈출 서사라면, 몸의 아픔과 노동의 피로,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상처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하며, 구원이 물질과 역사, 삶의 현장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신자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청한다. 하나는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요청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몸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요청이다. 병든 몸, 지친 몸, 차별받는 몸, 돌봄이 필요한 몸은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몸을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봉사가 아니라, 우주적 구원이 지향하는 회복의 질서를 지금 여기서 미리 구현하는 행위다. 장재형목사가 우주적 구원을 강조할수록, 교회가 생태와 사회, 약자와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이 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말하는 대목은, 자칫 상투적 위로로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성령의 탄식'과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그리고 성령이 그 선을 향해 우리를 붙드시기에 이 말이 가능하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 한순간에 설명을 얻는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신뢰가 이 문장을 지탱한다. 그래서 신자는 절망을 마침표로 찍지 않는다. 절망은 한 문장일 수 있지만, 복음은 그 뒤에 새로운 절을 이어 붙인다. 고난이 끝나야만 소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은 고난 한가운데서 이미 시작되고, 그 소망은 성령의 중보로 지속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역풍 속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이 모든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8장에서 길어 올리는 메시지는 "희망의 문법"이다. 그 문법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되 고난을 영광 아래 두고, 개인을 넘어 우주로 시야를 넓히며, 인간의 무력함을 성령의 중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8-27절을 따라가는 길은 낭만적 환상으로 도망치는 길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책임지는 길이 된다. 나는 무엇으로 내 현재를 해석하는가, 나는 피조물의 탄식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기도에서 무엇을 의지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들을 죄책감의 채찍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방향을 회복하고, 방향을 통해 다시 걸을 수 있게 한다. 신앙이란 완벽한 답을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돌아서는 은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자는 순례자다. 순례자는 길 위에서 완성을 누리지 못하지만 목적지를 아는 사람이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현재의 밤을 두려움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새벽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는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믿음의 사람은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새벽을 미리 보는 사람이다. 그 새벽은 현재의 고난을 의미 있게 견디게 하고, 피조물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게 하며, 기도를 포기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그 새벽의 빛은 우리의 실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권으로 역사를 이끄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작은 순종과 기도, 작은 절제와 돌봄, 작은 인내와 사랑은 결코 허무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장차 드러날 영광의 세계에 이미 연결된 씨앗이며,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8장을 통해 선포하는 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미리 발아하는 표지다.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8장 설교를 다시 읽는 것은, 개인의 구원 확신을 넘어 창조 전체의 회복을 향해 마음을 넓히는 일이다. 그 넓어진 마음이 오늘의 교회를 겸손하고 용기 있게 만든다. 그 용기는 매일 기도의 자리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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